HOST: 오늘 방송에서 로베르 뀔라 신부님은 자신의 저서 『동물에 대한 성서적 사유』에서 인용한 『찬미 받으소서』 회칙과 성경에서 인류를 비건으로 이끌고 동물 친구와 조화롭게 살도록 이끄는 말씀을 계속 소개하겠습니다.
R.C.: 교황님의 관점은 인간이 우주의 지도자이며, 특히 동물에게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는 독특한 역할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하여 공동의 도착점, 곧 하나님을 향하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품어주시고 빛나게 해주시는 초월적 충만 안에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교황님이 성 바울을 받아들인 방식을 봅니다. 『지성과 사랑이 부여된 인간은 그리스도의 충만으로 이끌려 모든 피조물을 창조주께 인도할 부르심을 받았죠』 고전적인 전통 신학에서는 오직 남자와 여자만이 신의 왕국인 낙원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서 매우 강하게 보이는 두 말씀을 찾았으며, 교황님이 이 고전적인 교리에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이 세상의 피조물은 더 이상 자연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 모든 피조물을 신비롭게 간직하고, 목적인 충만으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목적은 충만이며 낙원이 아닌데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바로 들판의 그 꽃들』 알겠죠? 동물만이 아니죠. 『예수님께서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고 감탄하신 들판의 그 꽃들과 새들은 그분의 빛나는 현존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찬미 받으소서에서 두 번째 인용문은 『영원한 삶』에 대해 솔직히 말씀하십니다. 『모든 피조물이 함께 나누는 영원한 경이가 될 것입니다 』 남자와 여자만이 아니죠. 『그 삶 속에서 눈부시게 변모된 피조물들은 자신의 자리를 찾고, 궁극적으로 해방된 가난한 이들에게 어떤 이바지를 하게 될 것입니다』 회칙 243항이죠. 그러므로 이 견해에서 인간이 우주의 지도자라는 것은 아주 정확하고 훌륭하며, 다시 한번 인간과 동물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통해 저는 유명한 창세기 1장 28절의 말씀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이 구절에서 기독교와 환경 운동 사이에 완전한 오해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구절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문제가 유래한 구절이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창세기 1장과 창세기 첫 2장에서 성서의 문맥으로 해석하면 문맥이 확장되므로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읽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남자와 여자죠.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다스려라, 우주의 지도자인 인간에게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 구절은 종종 이어지는 구절 없이 단독으로 인용됩니다. 그런데 다음 구절이 우리가 이야기했던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에게 비건 음식을 주시는 구절입니다.
따라서 모두 종합하면 다른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이런 지배는 폭력적이고 독단적이며 전제적인 나쁜 지배가 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성서에 어긋납니다. 매우 유명한 앞의 26절과 27절은 모든 기독교인이 외워서 알고 있지만 29절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전의 구절은 이상하게 잘 알고 있죠.
말한 내용을 보면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우리가 남자와 여자를 만들자』 요약하자면 남자와 여자는 피조물의 왕이지만, 그들의 왕권에 주어진 지시에서 하나님은 『네가 원하여 된 왕이니 네 마음대로 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왕인 이유는 첫째, 창조주 아버지의 권위에 참여하고 둘째, 하나님 아버지의 태도를 본받은 왕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 독재적인 왕권은 없습니다. 이 관점에서 놀라움을 주는 시편은 우리에게 피조물과 동물에 대한 인간의 왕권에 대한 지침을 제공합니다.
그래서 그 의미를 보면, 하나님은 동물에게 선하시고 관심이 있으시며 사랑하시고 동물의 아버지이시니, 인간이 땅에서 신을 대표한다면 신과 똑같이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논리적이죠. 제가 말했듯이 이 29절을 발견한 것이 가장 놀랍죠. 결정적인 발견이자 재발견입니다.
이사야서 11장은 아주 잘 알려진 말씀으로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며, 메시아의 출현을 알려주므로 미래를 얘기할 때 활용되는 성서입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늑대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등등 이사야서의 이 아름다운 광경에서 실제로 그는 무엇을 보나요?
그는 동물들 사이의 보편적인 화해를 이미 보고 있음으로 동물들 사이에 이젠 폭력이 없을 것이고, 사자도 이제는 영양을 죽여 먹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동물과 인간 사이에도 더는 폭력이 없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우리에게 화합의 세상을 묵상하게 합니다.
끝으로 이사야서 11장을 창세기 1장과 나란히 읽는 것은 매우 흥미롭지요. 왜냐하면 창세기 1장엔 태초에 하나님의 창조 계획이 있고 이사야서 11장에는 종말 시기에 하나님의 왕국 안에서 본래의 모습으로 회귀할 것이라 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불행하게도 인간의 죄와 악으로 인해 그것이 어긋나고, 잊어버리고 멸시를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