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토머스 머튼 신부의 저서 『고독 속의 명상』을 계속 소개하겠습니다. 여기서 이 신비가는 신을 관상하는 신성한 행위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전합니다.
10장
우리의 내적 자아를 온전히 하느님을 향하게 하지 않고 하느님을 관상하려 한다면 결국엔 어쩔 수 없이 자신을 관상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우리 자신의 감각적 본성인 따뜻한 어둠의 심연으로 뛰어들 것이며, 이것은 마음 놓고 수동적으로 남을 수 있는 어둠이 아니다.
반면 우리의 상상력과 감정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면 하느님께로 회심하는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 날뛰는 영상 속으로 뛰어들어 우리 스스로 종교적 경험을 날조할 것이다. 이것 역시 위태롭다. 온 존재를 하느님께 『향하게 함』은 참되고 깊고 단순한 믿음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때 하느님과의 접촉이 가능하다는 희망과, 무엇보다도 그분의 뜻을 행하고자 열망하는 사랑이 이 믿음에 생기를 준다. 때때로 묵상은 하느님께 향하려는, 또 믿음으로 그분 얼굴을 찾으려는 성공하지 못한 투쟁일 뿐이다.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일이 효과적인 묵상을 도덕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런 경우 믿음과 선한 의지만 있으면 충분하다. 우리가 하느님께 향하려고 참으로 진실하고 정직하게 노력했는데도 정신을 가다듬을 수 없다면 그 시도를 묵상으로 간주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참된 묵상 대신에 우리의 실패한 노력을 자비로이 받아주심을 의미한다. 이러한 내적인 무력함이 내적 삶에 있어 진정한 진전의 표시인 경우도 있다.
이 무력함이 우리를 하느님의 자비에 보다 완전하고 평화롭게 의존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가 온전히 그분께 향할 수 있고, 그분과 대화하고 그분을 숭배하기 위해 다른 모든 걸 제쳐 놓을 수 있다 해도 그것이 항상 그분을 상상하거나 그분의 현존을 느낄 수 있음은 아니다.
우리의 온 존재가 온전히 하느님께 향하는 데는 상상력이나 감정이 필요치 않다. 하느님에 대한 『관념』에 강렬한 집중이 요구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언어로 전달하기는 어렵지만 매우 현실적이고 인지 가능한 - 그러나 거의 정의하기 불가능한 - 하느님의 현존이 있다.
이 현존 안에서 우리는 기도 중에 그분을 대면하며, 우리를 아시는 그분을 알고, 우리를 의식하시고 사랑하시는 그분을 의식하며 사랑한다. 자신의 충만한 인격 안에서 자신을 대면하듯이 우리는 존재와 타자성과 자아가 무한하신 그분과 대면한다.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닌, 소아와 대아의 대면이다.
이 대면 중에 온 존재를 경건히 집중하여 보면 그분 안에 존재하는 바로 그분을 알게 된다. 그분의 현존에 눈을 뜨는 『눈』은 우리 겸손의 한가운데, 우리 자유의 중심에, 우리 영성의 가장 깊은 곳에 존재한다. 묵상은 다름 아닌 이 눈을 뜨는 일이다.
11장
성찬식으로 자라고 교회의 기도와 가르침으로 형성된 우리는 교회 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원하신 특정한 장소만을 찾을 필요가 있다. 그곳을 찾으면 우리의 삶과 기도는 동시에 지극히 단순해진다. 그러면 진정한 영적인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것에는 하나의 선행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으며, 어떤 장소에 사는 것이나 하나의 방식으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우리 영혼에 대한 어떤 특별한 심리적 영향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 앞에서 우리 온 존재의 회개와 숭배의 침묵이다. 하느님이 만유임을 항상 깨닫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분은 만물의 중심이며, 우리의 모든 행동을 그분께 향해야 하는 그 중심이다. 우리의 생명과 힘이 하느님에게서 나오며, 우리는 삶과 죽음에서 온전히 하느님께 의지하며, 우리 삶의 모든 과정을 하느님이 미리 아시고 지혜롭고 자비로운 섭리의 계획에 들어가는 것이다.
마치 하느님이 없는 것처럼 자신을 위해 그리고 자신에 의해 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와서 하느님 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모든 계획과 영적 야망이 소용없는 것처럼,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하느님의 영광뿐이다.
심리적인 과정에 지나지 않는 평화 속에서 끊임없이 기도를 살피고 기도의 결실을 찾는다면 우리는 기도의 생명을 망친다. 관상기도에서 찾아야 할 것은 오직 하느님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자신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분을 찾을 수 없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그분을 성공적으로 찾고, 동시에 우리가 이미 그분을 찾지 않았다면 그분을 찾도록 영감을 주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가난에 만족하면 할수록 하느님과 더 가까워지며, 우리의 가난을 평화롭게 받아들이며, 자신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긴다. 가난은 자유의 문이다. 가난 자체가 내포하는 불안과 제약 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희망의 원천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였고, 우리 안에 지킬만한 것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에게는 특별히 사랑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떠나서 홀로 희망이신 하느님께 안식한다. 영적 삶에는 우리가 자신 속에서 하느님을 찾는 단계가 있다. 이 현존은 그분 사랑이 창조한 효과이다. 그분이 주시는 선물이며, 그것은 우리 안에 남아있다. 하느님의 선물은 모두 좋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 안이 아니라 그들 안에 쉬면, 그들은 우리를 향한 선함을 잃고 선물 역시 그렇다. 우리가 다른 일에 착수할 적기가 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굳건히 하시려고 그 현존을 버리신다. 그 후에 어떤 심리적 영향의 매개체로 그분을 찾는 것은 소용이 없다. 우리 마음속에서 그분의 어떤 감각도 찾을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자신에서 밖으로 나가서 더는 우리 안이 아니라 우리 바깥에서, 그리고 우리 위에서 하느님을 찾아야 할 때가 왔다. 먼저 충실한 믿음으로, 가난의 잿더미 아래 뜨거운 석탄처럼 타오르는 희망으로 이 일을 한다. 또한 겸손한 사랑으로 형제들을 섬기며 그분을 찾는다. 그때 하느님의 뜻이 우리를 간단하게 그분께로 올려주신다.
하느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지탱해 달라고 간청하지 않는다면 우리 약점을 아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우리가 가난을 인정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가난을 이용해 그분 자비를 애원하지 않는다면 미덕이 있다는 생각에 안주하는 것도 나쁘지만, 우리의 약점과 죄를 의식할 때 부주의한 타성으로 태만한 것은 더 나쁘다.
우리의 나약함과 가난의 가치는 하느님이 욕망의 씨앗을 뿌리는 땅이다. 우리가 아무리 버림받은 것처럼 보이고 비참한 불행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싶은 확신에 찬 열망이 바로 하느님께서 계신다는 표시이자 구원의 맹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