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머튼 신부는 가톨릭의 중요한 신비가, 영적 사상가로서 1915년 뉴질랜드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에서 태어났습니다. 수도사 생활 중에 토머스 머튼은 종교적 글을 번역하고 자서전을 집필하며 작문능력을 개발했습니다. 또한 영성, 사회의 정의와 평화에 대한 주제로 시와 책, 기사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머튼의 가장 유명한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게 성자가 되는 것은 나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성과 구원의 문제는 사실상 내가 누구인지, 나의 참 자아를 발견하는 문제입니다』 또한 그는 말하기를 『우리는 아주 투명한 세상에 살고 있으며, 신은 이것을 통해 항상 빛나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멋진 얘기나 우화가 아닌 진실입니다』 모든 종교의 평등함을 믿는 토머스 머튼은 만년에 동양의 전통에 깊은 흥미를 보였습니다. 그는 또한 14대 달라이라마와 활발한 담화를 나눴습니다.
오늘은 켄터키주의 토머스 머튼 센터와 토머스 머튼 국제 협회에서 이 현명한 신부의 삶과 활동을 계속 알아보겠습니다. 오늘은 토머스 머튼의 저서 『고독 속의 명상』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성직자는 신과 진정한 교감 속에서 내면의 영적 상태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9장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알고 체험하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나의 환상과 실수를 혐오하여 그것에서 떠나고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나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인 것처럼, 그것을 내게 분리하는 것으론 충분하지 않다. 이런 종류의 자기 말살은 보다 심한 환상일 뿐이며 위장된 겸손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은 『현재의 내가 아니면 좋겠다』는 뜻이다. 이런 생각은 우리의 결함과 무리함을 경험하기에 나올 수 있지만 우리 내면에 그 어떤 평화도 가져오지 못한다. 자신이 보잘것없음을 진실로 알기 위해서는 그 사실을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좋은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사랑할 수 없다. 또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좋은 것임을 깨달을 수 없다.
우연성에 대한 우리의 초자연적인 경험은 무엇보다도 하느님 앞에서 도덕적, 형이상학적으로 우리가 무력하다는 걸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겸손을 가질 때 일어난다. 이처럼 보잘것없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것인 그 무엇도, 우리가 가진 어떤 모습도 거부해서는 안 된다. 모두가 우리의 것이며, 그 모든 것이 하느님에서 오기에 그 실체가 선함을 이해하고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무력함, 우리의 도덕적 또는 영적 비참함이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끌어당기기 때문에 우리의 결함조차도 선하다.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사랑하려면 오만한 자가 자신을 사랑하듯이 내면의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정반대의 이유로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의 보잘것없음을 사랑하기 위해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오만한 사람은 자신이 사랑과 존경과 숭배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므로 자신을 사랑한다. 자신이 하느님과 사람에게 사랑 받아야 한다고 여기고, 다른 이들보다 자신이 더 존경받고 사랑받고 숭배 받을 만하다고 여기기에 자신을 사랑한다.
겸손한 사람도 자신을 사랑하며, 사랑받고 존경받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이 사랑과 존경에 합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하느님의 자비에 의해 사랑 받으려고 애쓴다. 그는 동료의 관대함으로 사랑받고 도움받기를 간청한다. 자기에게 아무것도 없음을 알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모든 것이 필요함도 알고 두려움 없이 필요로 하는 것을 간청하고 얻는다. 오만한 사람은 자신의 환상과 자만심을 사랑한다.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사랑한다. 오만한 사람은 아무도 가지지 못한 걸 자기가 가졌기에 존경을 요구한다. 겸손한 사람은 다른 모든 이가 받은 것을 나누어 달라고 간청한다. 그는 또 하느님의 친절과 자비를 넘치도록 받기를 갈망한다.
10장
영적 생활은 무엇보다 하나의 삶이다. 그것은 단지 이해하고 연구해야 할 그 무엇이며, 또한 살아야 할 무엇이다. 다른 모든 삶처럼 영적 삶은 고유의 영역에서 뿌리가 뽑히면 병들어 죽게 된다. 은총이 우리의 본성에 심어지면 인간은 성령의 현존과 일하심에 의해 오롯이 거룩하게 된다. 그러므로 영적 삶은 인간적 상황으로부터 완전히 뿌리 뽑혀져서 천사들의 영역으로 옮겨 심어진 삶이 아니다. 하느님을 찾는 인간으로 살 때 영적 인간으로 산다. 우리가 영적으로 되려면 인간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신학적으로 이에 대한 증거가 불충분하다 하여도 그리스도의 육화의 신비 자체가 충분한 증거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성스러운 인간성을 통해 인간을 하느님과 신비롭게 결합해 인간을 구원하는 게 아니면 왜 인간이 되셨겠는가? 예수께선 모든 시대를 통해 사람의 일상적 삶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 당시의 모든 이와 같은 평범한 삶을 사셨다. 영적 사람 되려면 무엇보다 자신의 삶을 살도록 하자.
하느님의 뜻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일에 대한 책임과 피할 수 없는 혼란을 두려워하지 말자. 현실을 얼싸안고, 어디서나 우리를 둘러싼 하느님의 생명 의지와 지혜에 깊이 잠겨 있음을 알아보자. 먼저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자신이 아는지 확인하자. 믿음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이 일상생활 속에 내재함을 이해하는 빛을 우리에게 줄 수 있다. 이 빛이 없으면 우리는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이해력을 얻을 수 없다. 이 확실성이 없이는 우리는 초자연적인 확신과 평화를 가질 수 없다. 가장 깊이 깨달았을 때도 우리는 끊임없이 비틀거리고 넘어진다. 그러나 진정한 영적 어둠 속에 있을 때는 넘어져도 넘어진 사실조차 모른다. 영적으로 항상 살아있기 위해 우리 믿음을 끊임없이 쇄신해야 한다. 짙은 안개 속을 항해하는 기선의 키잡이처럼 우리 앞의 어둠을 응시하며 다른 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항구에 무사히 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영적 삶은 무엇보다 깨어 있음의 문제이다. 영적인 영감에 대한 감수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 영적으로 살아 있는 영혼의 깊은 곳에서 마치 숨어 있는 본능에 의해 울려 나오는 아주 나지막한 경고에도 항상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 묵상은 영적 인간이 스스로 항상 깨어있게 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의 하나이다. 종교적 완전함을 열망하는 대부분 사람이 다름 아닌 묵상 중에 둔감해지고 잠들어 버린다는 것은 역설적인 일이 아니다. 묵상 기도는 엄격한 훈련이며 억지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용기와 인내를 요구한다. 끈기 있게 그것을 배울 의지가 없는 사람은 마침내 타협하고 말 것이다. 여타의 경우처럼 여기서도 타협은 실패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묵상은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공적인 묵상은 추론이나 사고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애정』이나 우리가 행하는 일련의 준비된 『행위』를 훨씬 넘어선다.
묵상 기도에서 우리는 마음과 입으로만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선 『온 존재』로 그렇게 한다. 그때 기도는 단순히 공식적인 단어나 가슴 속에서 솟구치는 여러 가지 갈망만은 아니다. 그것은 침묵과 집중과 찬미 속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온통 하느님께 향하게 함이다. 모든 훌륭한 묵상 기도는 우리의 온 존재가 하느님을 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일종의 내적인 격앙 없이는 이런 의미의 명상에 들어갈 수 없다. 이때 격앙은 혼란이란 의미가 아니라 일상에서의 탈출, 일상의 근심과 관심사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 진하게 내적 기도에 몰두하는 사람이 적은 이유는 이 내적인 격앙이 필요한데도 이를 조성하기 위해 노력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관대함이 부족한 것인지도 모른다. 또 방향감각과 경험이 없어서 엉뚱한 길에서 헤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혼란에 빠져서 평정을 되찾기 위해 평정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다가 마침내 희망을 잃는다.
그들은 결국 그럭저럭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일련의 허망한 일들과 타협하거나 관상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반 혼수 상태로 빠져든다. 모든 영성 지도자는 내적인 게으름과 수동적 관상의 희미하고 인지되지 않은 초기 단계 사이의 경계선을 결정하기란 어렵고도 미묘한 문제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현재는 수동적 관상에 대해 실제로 상당히 많이 논의됐기에 게으른 자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기도하는』 특권을 자신이 누리고 있다고 주장할 근거를 주고 있다. 아무것도 인식하거나 느끼거나 생각하지 못 하는 기도는 있을 수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기도란 없다. 모든 참된 내적 기도는 아무리 단순하다 해도 우리 온 존재가 하느님을 향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 우리의 노력으로 능동적으로 이루어지든지 성령의 일하심에 의해 수동적으로 이루어지든지 간에 - 우리는 『관상』에 들어가지 못하며, 하느님께 닿으려는 노력을 이완할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