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계속해서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생활의 기술』에서 귀중한 안내를 보내드립니다. 이 책은 큰 존경을 받는 이 사상가가 날마다 영적 통찰을 기록했지요. 이어지는 매일의 명상은 배움의 더 심오한 방법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것은 단순히 지식을 기르고 우리의 삶을 통해 경험한 인상과는 다릅니다.
집중해서 보라
나에게는 배운다는 것이 몹시 어렵게 여겨지며, 듣는 것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실은 어떤 것도 전혀 듣지 않는데, 우리 마음이 자유롭지 않고 우리 귀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로 꽉 막혀있기에, 그래서 듣기가 몹시 어려워졌습니다. 내 생각은, 아니 오히려 사실은 만일 사람이 그의 존재의 모든 것으로 활기차고 꾸준하게 무언가를 들을 수가 있다면, 그때 듣는 행위는 해방의 요인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신은 절대로 듣지 않아서 그것에 대해 전혀 배운 것이 없습니다. 결국 당신의 존재 전부를 어떤 것에 몰두할 때만이 배울 수 있습니다. 당신의 존재 전체가 수학에 몰두할 때 배우지만, 그러나 모순된 상태에 있으면, 즉 원하지 않지만 배우도록 강요당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축적과정에 불과합니다. 배우는 것은 무수한 인물이 나오는 소설을 읽는 것처럼 모든 주의력이 필요하나 모순되는 주의력은 아니죠.
만일 나뭇잎에 대하여 배우기를 원하면 봄의 나뭇잎 또는 여름의 나뭇잎을 확실히 보아야 하고 그것의 대칭과 짜임새, 살아있는 잎의 특성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의 잎에도 아름다움과 활력과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러니 잎과 꽃, 구름, 일몰 또는 인간 존재에 관해서 배우려면 당신은 모든 주의력을 기울여 보아야 합니다.
배우는 데는 마음이 고요해야 한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면 자신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특히 지식은 완전히 벗겨진 상태에서 여정을 시작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지식과 믿음을 통해 경험하는 것이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은 단순한 자기 투영의 산물이고, 그래서 완전히 비현실적이고 가짜입니다. 만일 당신이 스스로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면 옛날의 짐을 옮겨오는 것은 좋지 않은데, 특히 지식이 그렇습니다.
다른 분야의 지식이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요. 당신은 지식을 자신의 투영과 보호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당신은 부처님, 그리스도 또는 모모와 동일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지식으로 끊임없이 보호하는 사람은 진리의 탐구자는 확실히 아닙니다. 진리의 발견에는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새로운 무엇을 발견하기 원할 때나 당신이 어떤 것을 실험할 때는 마음이 매우 고요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음이 사실들과 지식으로 혼잡하다면 그것들이 새로운 것에는 장애물로 작용합니다. 우리 대다수가 겪는 어려움은 마음이 매우 중요해졌기에, 매우 뚜렷하게 중요해져서 무엇이든 새것이라면 마음이 끊임없이 방해함을 알고 있기에 알려진 것들과 함께 살아갈 겁니다. 그래서 지식과 배움은 구도자들에게는 장애물이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에게 장애물은 영원히 존재합니다.
배우는 것은 경험이 아니다
배운다는 말에는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두 종류의 배움이 있습니다. 우리 중 대부분에게 배움은 지식의 축적을 의미하는데 경험, 기술, 솜씨, 언어의 축적을 의미합니다. 또한 정신적인 배움이 있으며 경험을 통한 배움도 있고, 또한 삶의 즉각적인 경험들도 있는데 그것들은 어떤 잔류물 즉 전통과 종족, 사회의 잔류물을 남깁니다. 이러한 두 종류의 배움이 삶과 만나는 방식에는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즉 외향적 기술과 내향적 기술이 있습니다.
실제로는 둘 사이에는 경계선이 없고, 그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훈련을 통해서 배우는 기술의 순간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공부를 통해서 얻은 기술적 지식도 고려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관심이 있는 것은 정신적인 배움인데 그것은 우리가 수 세기에 걸쳐서, 또는 전통으로 계승된 지식이나 경험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배움이라고 부르는데 나는 전혀 배움이 아니라고 의심합니다.
나는 숙련이나 언어나 기술의 배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묻는 것은 마음이 항상 정신적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마음이 배웠고, 배운 것으로 마음이 삶의 도전과 만납니다. 그것은 항상 삶을 바꾸거나 배운 대로 새로운 도전을 합니다. 그게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배우는 것이지요? 배우지 않는 것은 새로운 무엇을 암시하는데, 내가 모르는 무엇을 배우고 있는 것인가요? 내가 이미 아는 것에 단순하게 더하기만 한다면 더 이상 배움이 아닙니다.
언제 배움이 가능한가?
조사하는 것과 배우는 것은 마음의 기능입니다. 내가 뜻하는 바는 배움에 의한 단순한 기억이나 지식의 축적이 아니고 분명하고 분별력 있게, 착각 없이 생각하는 능력을 말하는데 사실에서 출발하며 믿음과 이상에서 출발하지는 않습니다. 만일 생각이 결론에서 나온다면 배움은 없습니다.
단순히 정보나 지식을 얻는 것은 배움이 아닙니다. 배움은 이해를 사랑하고, 스스로 어떤 것을 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을 내포합니다. 배움은 어떤 종류의 강요도 없어야 가능합니다. 그리고 강요는 많은 형태를 가집니다. 그렇지 않나요? 강요는 영향력을 통해서, 애착이나 위협을 통해서, 설득력 있는 격려를 통해서, 또는 미묘한 보상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대부분 사람은, 배움은 비교를 통해서 격려된다고 생각하는데 실은 그 반대가 사실입니다. 비교는 좌절감을 불러일으키고 또 단지 질투심을 유발하는데, 그것을 경쟁이라고 합니다. 설득의 다른 형태처럼 경쟁은 배움을 방해하고 공포를 일으킵니다.
배움은 절대로 축적되지 않는다
배우는 것과 지식 습득은 다른 것입니다. 배우는 것은 연속적인 과정입니다. 첨가의 과정이 아닙니다. 당신이 수집해서 그곳에서 행동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우리 중 대부분은 지식을 기억과 사상으로 모아서 그것을 경험으로 저장하고 그것으로부터 행동합니다. 우리는 지식으로부터 행동합니다.
기술적 지식, 경험으로서의 지식, 관습으로서의 지식, 사람은 그의 특이한 경향들로부터 유래한 지식에 의해 행동합니다. 그런 배경과 함께 그 축적을 지식으로 하여 경험대로, 관습대로 우리는 행동합니다. 그 과정 안에서 배움은 없습니다. 배움은 절대로 축적되지 않는 끊임없는 운동입니다.
나는 당신이 이 질문을 해본 적 있는지 궁금합니다. 즉 무엇이 배움이고 또 무엇이 지식의 습득인지를요. 배움은 절대로 축적되지 않습니다. 당신은 배움을 저장할 수 없고, 그때 그 저장소가 작동합니다. 당신은 계속 나아가면서 배웁니다. 따라서 퇴보나 악화나 또는 쇠퇴의 순간은 절대로 없습니다.